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의 핵심 프로젝트: 관악 캠퍼스 이전 사업의 전말

2023. 5. 5. 08:00도시 이야기/도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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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이전 사업: 머리말

      혜화역을 가끔 둘러보면 근처에 자리 잡은 서울대학교 병원이 눈에 띈다. 서울대 병원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서울대학교가 여기에 있지 않은데 왜 병원만 덩그러니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서울대학교의 본 캠퍼스라 볼 수 있는 관악 캠퍼스는 한강 이남 지역에 위치해 있는 반면 서울대 병원은 한강 이북 지역에 있으니 말이다. 서울대 의과 학생들은 병원 실습과 학업을 어떻게 병행할까 의문이 들었다.

    서울대학교 개교 당시 캠퍼스 위치 <출처: 서울대학교의 70년사>

      궁금증이 커져갈 무렵 신림동 고시촌 자료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당시 우연히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이전 사업에 대한 댓글을 접하게 되었다. 해당 댓글의 내용은 대략 박정희 정권에 의해 서울대학교가 관악구로 이전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관악구를 떠올리면 조건 반사적으로 서울대학교가 생각나는데 이렇게 된 것도 생각보다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댓글 작성자의 농담으로 치부하려 했으나 『서울대학교의 70년사』 PDF를 접하고 그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 조차 잘 모르는 서울대학교의 관악 캠퍼스 이전 역사에 대해 작성 해보려 한다.

    2.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이전 사업: 서울대학교 종합화 5개년 계획

      어쩌면 관악구의 명물이라 볼 수 있는 서울대학교의 본래 위치는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그나마 모여 있던 곳이 동숭동과 연건동(現 혜화역)이다. 해외 대학교들 중 특히 미국에 있는 대학 캠퍼스를 보면 도시 전역에 대학교 건물이 흩어져 있는데 1960년대의 서울대 역시 해외 대학처럼 연립대학의 성격이 지나치게 강했다.

    서울대학교 연건 캠퍼스와 동숭동 위치

      단과대학들 사이의 분산 배치가 심각했기 때문에 학술교류, 합동 연구가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서 여러 지역에 걸쳐 분산된 캠퍼스를 4개 중심지역에 집중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1960년대부터 구체적인 계획을 지속적으로 제출했다. 세부 사항을 살펴보면 동숭동 중앙부에는 대학 본부 ·도서관 ·문리과대학 문학부 ·상과대학 ·법과대학 ·음악대학 ·미술대학 ·의괴대학 ·치과대학 ·약학대학 ·행정대학원을, 수원에 농과대학 ·수의과대학을, 공릉동(現 공릉역)에 공과대학 ·문리과대학 ·이학부를, 용두동(現 제기동역)에 사법대학을 설치하려 했다.

    1960년대 이전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 모습

      훗날 이 계획은 1962년 5월 문교부의 지시에 따라 종합화5개년계획으로 수정되었다. 동일계대학의 동일지 집중 원칙을 더욱 고수했다. 수정된 계획안을 통해 서울대학교는 1966년까지 6개 센터 중심으로 단과대학을 재배치하려는 청사진을 그렸다. 6개 센터는 본부 중심의 인문사회센터, 미술대학 중심의 예능센터, 이과대학 중심의 의치약센터, 사범대학 중심의 교육센터, 공과대학 중심의 공업센터, 농과대학 중심의 농업센터였다.

    現 방송통신대학교 본관 건물로 사용중인 前 서울 중앙 공업 연구소 건물 (위치: 혜화역)

    종합화5개년계획의 세부사항은 합리적인 구상안으로서 미네소타 대학에 제출한 서울대학교 실태 보고서에도 수록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계획은 흐트러진다. 정부의 예산 부족과 중앙공업연구소의 부지 이전 문제 때문이다. 서울대학교로 부지의 인수인계가 빠른 시일내에 이뤄지지 못하여 서울대학교 캠퍼스 종합화 사업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3.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이전 사업: 서울대학교 종합화 6개년 계획

      서울대학교 측은 종합화5개년 계획을 일부 수정하여 1966년에 종합화6개년계획을 선보인다. 기존의 5개년계획은 단과대학의 재배치만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추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것을 미리 염두하여 종합화6개년계획에는 단과대학의 재배치, 대학의 자율성 확보, 학사행정이나 학술교류, 연구활동의 개선 등 까지도 고려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 박정희 후보 벽보 <출처: 선관위>

      종합화6개년계획의 세부사항은 공과대학과 농과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단과대학을 동숭동으로 옮겨 메인 캠퍼스로 이용하고 공릉동과 수원을 각각 공업캠퍼스와 농업캠퍼스로 삼으려 했다. 실제로도 음악대학과 치과대학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이번 계획만큼은 현실로 이뤄지는 듯해 보였으나, 1967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의 개입으로 종합화6개년계획 역시 무산되었다.

    4.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이전 사업: 서울대학교 종합화 10개년 계획

      박정희 대통령의 개입으로 종합화6개년계획은 취소 되고 종합화10개년계획으로 변경된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제가 고도화 됨에 따라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변화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은 고도 인재 육성을 위해 서울대학교 수준을 세계 수준의 대학으로 끌어 올리려 했다. 종합화10개년 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기존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종합화 사업이 흘러가게 된다.

    1971년 서울대학교 배치도 <출처: 2021_서울대학교 홈페이지>

      1968년 4월 “서울대학교를 종합부지로 이전하고 종합화한다”는 내용의 종합화10개년계획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치고 6월 국회를 무사히 통과했다. 서울대학교 이전과 종합화 사업이 기정사실화 되는 순간이다. 10개년 계획에서 가장 눈여겨볼 점은 그간 서울대학교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관악산 서부 지역이 새로운 캠퍼스 부지로 선정된 것이다. 종합화6개년계획까지도 메인 캠퍼스는 동숭동이다.

    박정희 유신헌법 공표 <출처: 오마이뉴스>

      서울대학교 측과 정부 당국자들 모두 동숭동을 고수했던 이유는 기존 건물과 부지를 재활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안임을 서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합화 계획의 규모를 대폭 확장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왔기에 새로운 후보지들이 물망에 오르기 시작했다. 사업 실행 이전에 검토된 부지는 공릉동 공과대학 주변, 수원 농과대학 주변, 그리고 시흥군 안양읍 비산리였다.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부지 선정 <출처: 2021_서울대학교 홈페이지>

      신규 후보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캠퍼스를 보존하며 개발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안이었다. 그러나 지형적 문제와 부동산 투기 과열 등이 문제가 되어 최종적으로 사업부지를 선정하기까지 무려 2년이라는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던 와중 1970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로 캠퍼스 부지는 관악산 기슭이 선정되었다.

    관악컨트리클럽 내용 <출처: 위키피디아>

      고려 대상지가 아님에도 갑작스레 관악산 일대를 선정하게 된 이유는 (1). 서울 중심부와 가까움 (2). 한강 이남 지역에 위해 있음 (3). 광범한 활동영역을 보유함 (4).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갖춤 이라는 네 가지 이점을 정부에서 들었다. 서울이 지속적으로 확장 됨에 따라 당시 강남 개발붐이 한창이었기에 해당 부지는 이미 동서관광주식회사의 골프장이 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다. 정부의 서울대학교 관악산 이전 사업 발표에도 부지를 내주려 하지 않자 정부의 강한 의지로 관악산 서부 지역 부지를 내어준다.

    1974년 관악컨트리클럽 전경 <출처: 1974_한국정책방송원>

      마침내 1970년 4월 8일 서울대학교 이전 사업 기획위원회와 건설본부가 설치되었고 29일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위원회는 10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밑그림을 그렸다. 기획위원회의 손을 거친 최종 계획은 1971년 10월에 완성되었다. 캠퍼스 중심에 중앙도서관을 두고 동일축에 대학본부를 주변에 학생회관을 놓는 배치가 최종 선정되었다. 또한 교육지구를 양분하여 왼쪽에는 인문사회계열, 오른쪽에는 이공계열을 배치하고 낙성대로 이어지는 캠퍼스 북동쪽에 학생 기숙사와 교수 아파트 등 주거지역을 설치한다는 세부사항을 마련했다.

    1971년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기공식 <출처: 2021_서울대학교 홈페이지>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이전 사업 기공식은 1971년 4월 2일 관악산 부지에서 열렸다. 관악 캠퍼스 조성사업은 총 3단계로 기획되어 1단계를 1973년까지 완공하려 했으나 예산부족과 공사 지연으로 기한이 연장되어 최종 마감은 1974년 3월 30일에 이뤄졌다. 1단계 계획이 늦어 지면서 자연스레 2단계와 3단계도 연기되었다. 2단계는 1975년에, 3단계는 1977년 이후에 진행되었다. 관악 캠퍼스로의 본격적인 이전은 1단계 조성 사업이 마무리 된 이후 시작 되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전경 <출처: 서울대학교의 70년사>

      가장 먼저 이전한 것은 단과대학교로 1975년 1월 21일부터 1976년까지 공과대학 ·농과대학 ·의과대학 ·치과대학 ·보건대학 ·수의과대학을 제외한 기타 기구들이 이전했다. 남겨진 교육기구 가운데 공과대는 1980년, 농과대와 수의과대는 2003년, 보건대학원은 2010년에 이전을 완료했다. 서울대학교의 종합화 사업은 최근까지도 이뤄지는 현재 진행형 사업이다. 종합화로 인해 캠퍼스가 대거 이전하자 서울대학교와 연담화 된 상업시설 역시 따라서 이동했다. 본격적인 ‘관악시대’가 개막했다.

    5.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이전 사업: 서울대학교 종합화 직후

      정부 측에서는 서울대학교의 관악 캠퍼스 이전 사업을 위와 같은 4가지의 이점을 제시 하였으나 사실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 유지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학교는 국내 최고 학문의 장이라는 수식어 이전에 사회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역사적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한일회담 반대운동 <출처: 서울대학교의 70년사>

      1966년의 한일회담 반대운동, 1969년의 3선 개헌 반대운동 등 우리나라에 거대한 정치적 움직임이 보일 때마다 대학사회는 항상 선두에 섰고, 유수의 대학들 중심에는 서울대학교가 늘 있었다. 반면 1963년 등장한 박정희 정부 입장에서는 서울대학교의 역할이 그리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과 경기도 사이에 흩어진 서울대학교 캠퍼스는 학생 운동의 거점이 되었기 때문에 손 쉽게 다루고 싶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관악캠퍼스 설계를 설명하는 모습 <출처: 서울대학교의 70년사>

      박정희 정부는 사회적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학생 운동의 선두가 되는 서울대학교를 길들이고자 그동안의 서울대학교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관악산 산 기슭을 새로운 이전 부지로 선정했다. 대학교의 입구도 하나로 제한하고 산 기슭에 학교를 옮겨두면 군부대 처럼 관리자의 입장에서는 학생이나 교수진을 효율적으로 다루기 쉬웠을 것이다.

    서울대학교 캠퍼스에 진입한 전경들 <출처: 서울대학교의 70년사>

      서울대학교의 관악 시대 개막 이후 학문적 전문성과 학문적 체계가 윤곽을 갖추기 시작했다. 공간과 시설에 의해 제약 받았던 연구 환경이 크게 개선되어 대학의 효율적인 운영이 가능해졌다. 1960년대 이전부터 서울대학교 측에서 주장하던 종합화 사업의 목적을 일정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합화가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다. 대학의 자율성 약화 및 자치권 상실이라는 단점이 존재했다. 유신체제로 인해 대학의 자치는 퇴보했다. 종합화 캠퍼스 조성 이후 교수회는 인사권을 박탈 당했고 교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단체로 역할이 제한되었다.

    2015년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전경 <출처: 서울대학교의 70년사>

      새로운 공간에서 대학생들은 신규 공동체 문화를 만들었다. 도서관 본부 사이의 넓은 잔디와 계단은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는 공간이었는데 민주주의를 연상시키는 의미로 ‘아크로폴리스’라 명명했다. 일명 관악세대는 1975년 이후 저항문화를 만들어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을 선도하는 중심이 되었다. 1970년대 서울대학교 종합화10개년계획을 통해 관악 시대를 맞이하고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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