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음의 얼굴을 보았다

2022. 4. 14. 08:00내 생각/어쩌다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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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호수-Schlachtensee-구글-위성-지도-사진

    베를린 호수에서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행 유학길에 오른 지 막 한 달쯤 되었을 시기다. 강남 스타일 덕분에 어학원에서 유럽계 친구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매주 금요일이면 친구들과 함께 했다. 대부분의 일정은 맥주였다. 페스티벌에서 마시거나 나 자전거를 타고 옆동네 포츠담(Potsdam)까지 놀러 가 마시기도 했다. 그러다 하루는 슐락탄제(Schlactensee)라는 호수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날이 토요일이었는데 아직도 그곳까지 가는 지하철(S-Bahn)을 탔던 게 생생히 기억난다.

      슐락탄제는 베를린 좌측 하단에 위치해 있어 교통이 영 좋지 않다. 스리랑카 출신의 어학원 친구가 기숙사로 초대해서 방문했다. 도착해서 본국에서 함께 독일로 유학 온 스리랑카 유학생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여기까지 올 정도니 얘기를 어느 정도 들어보니 귀족 집안 출신이라 그랬다. 내 친구는 의료계 대학원 때문에 왔고. 친구의 친구들은 음악 전공으로 왔다. 살면서 라이브로 스리랑카 음악 전공 출신의 노래를 들었다.

      기숙사에서 간단한 음식을 먹고 친구의 친구들과는 작별했다. 어학원 친구들끼리만 시간을 보냈다. 그날 모인 인원이 약 6명이라 슐락탄제역 근처 잔디에서 3대 3으로 공을 찼다. 그때 이탈리아 친구가 올려준 공을 왼발 논스톱 슛으로 마무리했다. 갖다 대기만 했는데 들어가서 놀랬다. 그 모습을 보고 나더러 지성팍이며 따봉을 올려줬다. 아직 박지성 선수가 영국에서 현역 생활을 할 때라 그런 것 같다.

      날이 너무 더워서 잠깐 그늘에서 쉬기로 했다. 베를린에 있으며 느낀건 해가 정말 뜨겁다. 독어 과외 선생님이 여름에 유난히 독일의 해는 낮게 뜬다고 말을 했는데 생활하며 느꼈다. 그늘에서 쉬니 좀 나았졌다. 그래도 온도가 워낙 높고 2시간 정도 축구를 한터라 다들 기진맥진해 보였다. 결국 더위를 식히자며 문제의 호수인 슐락텐제로 향했다. 7유로 정도면 작은 보트를 빌릴 수 있다고 해서 갔다. 그때 여권을 두고 가서 나를 대신해 여권을 가지고 있던 친구가 보트를 대여했다. 이때까진 몰랐다. 보트가 원흉이 될 줄은.

      친구들과 유유자적 보트를 타고 호수의 중앙까지 갔다. 처음에는 다들 보트에 앉아 손에 물을 받아 얼굴에 튀기더니 이내 행동들이 커졌다. 물속에 들어가는 친구도 있었고, 거기서 끌어당기는 녀석도 있었다. 아무튼 남자들을 모아두면 짓궂게 장난을 친다. 그중에 나도 껴있었는데 친구들을 물을 튀기기도 하고 친구의 팔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그러다 지쳐서 다시 보트로 올라왔다.

      친구들이 다시 올라온 내 모습을 보더니 한 명은 내 주의를 끌고 다른 친구는 나를 당겨 물에 입수시켰다. 원래 배영이라도 할 수 있어서 물에 들어갔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통상 몸에서 힘을 빼면 위로 뜨게 되는데 누군가 내 다리를 붙잡고 다리를 끄는 느낌이 났다. 처음에는 친구가 당기나 싶었다. 상식적으로 호수 정중앙에서 누가 그럴까. 이 생각이 들자마자 공포심이 들었다. 어떻게든 위로 올라오려고 발버둥 쳤으나 그럴수록 점점 더 가라앉았다.

      보트에 있는 친구들을 보며 도와 달라고 소리쳤지만 애들은 장난치는 줄 알고 오히려 더 멀리 달아났다. 몸은 뜨질 않고 입안으로 물이 계속 들어왔다. 이제 독일에 온 지 딱 한 달이 되었는데 벌써 죽는구나.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것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이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주마등이구나 했다. 이마까지 물속에 잠길 때쯤 친구가 아까 썼던 축구공을 던져줬다. 가까스로 공을 잡아 물에 뜰 수 있었다.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어서 집에 가려고 하는데 이탈리아 친구가 자기네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라며 불렀다. 초면에 외국인 집에 가서 밥 먹는 건 실례라고 들어서 거절했지만 극구 괜찮다며 우리 모두를 데리고 갔다. 친구네 집에서 약혼녀를 만났다. 오늘 내가 죽을 뻔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갑자기 약혼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아래서 당기는 느낌 나지 않냐며 말을 이어갔다. 매년 몇 명씩 호수에서 익사 사고가 일어난다고 그랬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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