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12. 08:00ㆍ카투사 일기
훈련소 3주 차
생활관에서 훈련 교장으로 향했다. 단독군장과 소총을 챙겼다. 비가 올 예정이었기에 판초 우의도 함께 지참했다. 교장으로 가는 도중 카라반을 봤다. 이글루처럼 생긴 카라반을 보며 나도 여행을 가고 싶단 생각을 했다.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해서 판초우의를 뒤집어썼다. 겨울이라 날이 추워서 그런지 비는 어느 순간 눈으로 변했다.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 때문에 손끝에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느껴졌다.
교장에서 배운 내용은 경계와 수하를 배웠다. 경계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암구호 관련된 내용이였고 수하는 전투 중에 필요한 수신호를 배웠다. 훈련소 조교와 부사관이 시범을 보였다. 시범을 보이는 사람들은 쉽게 하던데 막상 내가 해보니 굉장히 어려웠다. 암구호 자체가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데 내 차례가 되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조교들도 이를 잘 알고 있는지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옆에서 친절하게 알려줬다.
지난주에 찍었던 우리분대 단체사진을 받았다. 3주라는 시간을 한 공간에서 매일 보내서 그런지 다들 나이와 상관없이 친해졌다. 각자의 얼굴을 평가하며 시간을 보냈다. 머리도 없는 빡빡이 군인들이었지만 지난주만큼은 다들 열심히 외모를 꾸몄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 덕인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받을 수 있었다.
훈련교장에 카투사 교육대장이 방문했다. 외부 훈련 때 점심을 먹고 쉬고 있었는데 그때 시간을 맞춰 우리를 찾아왔다. 눈이 부리부리하며 덩치가 큰 교육대장을 보니 위압감이 느껴졌다. 우리더러 교육생들 중 목소리가 가장 작다며 윽박지르기를 시전 했다. 어느 정도 하다가 말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짧은 군생활이었지만 이 중에서 가장 긴 기강 잡기였다. 우리더러 '너희들은 카투사가 아니다. 그냥 육군이다. 최고의 군대에 오고 싶으면 최고가 되어라.'라는 가시 돋친 말을 남겼다.
미군 체육복을 입고온 카투사 사병이 우리들 앞에 서서 미군 PT(Physical Test) 규정과 방법에 대해 영어로 소개하고 직접 시범을 보였다. 팔 굽혀 펴기, 윗몸일으키기를 보여줬다. 팔 굽혀 펴기의 각이 살아 있었다. 팔의 각도를 보며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가 그동안 연습하던 팔 굽혀 펴기는 팔 굽혀 펴기가 아니었다. 마음을 굳게 잡고 더 열심히 훈련에 임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육대장의 방문이 끝나고 사로에서 서서쏴, 엎드려쏴 등 총기사격 자세와 관련된 훈련을 진행했다. 겨울 장마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번 주는 계속 비가 내렸다. 훈련 교장과 교장으로 이동하는 중에만 내리는 비가 너무 얄미웠다. 비 때문에 바닥이 진흙밭이 되어 진흙 속에서 뒹굴었다. 엎드려쏴 자세에선 가슴과 허벅지에 진흙이 달라붙어 너무 추웠다. 진짜 전쟁을 하면 이런 것도 버텨야 할 텐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침점오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동안은 계속 비가 오는 바람에 실내 점오를 했다. 좋은 시기가 다 끝나버렸다. 훈련소 조교가 총기 영점사격 때, 이를 도와줄 사격 도우미를 지원받는단 말을 남겼다. 내가 총을 잘 쏘는 사람인지 판단이 안 서서 총기 도우미를 자진해서 신청했다. 사격 도우미를 하면 조금 더 많은 사격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다고 들어서다. 예상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신청하지 않아서 별다른 장애물 없이 사격 도우미가 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른 분대 인원들을 식당 앞에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같은 시기에 입대한 축구선수들한테 사인을 받았다. 인터넷으로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대하는 선수가 있다고 얼핏 들었는데 나랑 같은 동기인줄은 몰랐다. 중대는 달랐지만 같은 생활관 건물을 이용했기에 식당도 같은 곳을 이용했다. 쭈뼛쭈뼛 선수에게 다가가 양해를 구하며 사인을 받았다. 안 해줄까 봐 걱정을 했지만 의외로 흔쾌히 해주시고 얘기도 잘 들어줘서 너무 좋았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는데 부대 번호가 이상하게 뜨는지 여러번 통화를 시도한 끝에서야 전화를 할 수 있었다. 부대라는 격리된 시설 속에서 익숙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유일하게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친구들과는 보통 편지, 세상사, 본인 인생사 같은 얘기를 나눴다. 사소한 얘기들이지만 군대라는 곳이라 그런지 듣기만 해도 즐거웠다.
주말에는 오전종교와 오후 종교를 신청해서 다녀올 수 있다. 지난번에는 오전에만 다녀오고 오후엔 안 갔는데 막상 안 가니 또 할 게 없어서 이번에는 둘 다 신청했다. 오전엔 원불교를 다녀왔고 거기서 또 국가대표 축구선수를 만날 수 있었다. 원불교를 가장 좋아했는데 원불교에서는 TV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를 틀어줘서 자주 갔다. 오후에는 불교를 신청했고 거기서 인상 깊은 스님의 말씀을 들었다. '소와 뱀은 똑같이 물을 마시는데 소는 누군가에게 이로운 우유를 만들고 뱀은 누구를 해치는 독을 만든다.'란 얘길 들었다.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되느냐 그건 본인에게 달려 있단 말도 첨언했다. 머리가 멍해졌다.
이번주 일요일에 처음으로 PX에서 과자를 구매했다. 조교가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양 정도만 구매하라고 했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교육장에서 한 번에 먹고 남은 건 전부 폐기할 거라고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과자를 3주 만에 봐서 그런지 눈이 돌아가 정확한 판단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미친 듯이 과자를 집고 교육장에서 토할 정도로 과자를 먹었다. 과자가 좀 남았는데 분대 동기가 빼빼로를 모자 속에 숨겼다가 걸려서 반성문을 썼다. 확실히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
훈련소 4주 차
개인사격 훈련이 시작 되었다. 사격 도우미를 신청했기에 다른 인원들 보다 좀 더 먼저 출발하여 훈련 교장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하여 조교들의 설명을 듣고 조금 쉬고 있으니 인원들이 도착했다. 8시간 동안 사로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인원들을 순서대로 집어넣는 역할을 진행했다. 남들이 쏘는 걸 보니 개인 편차가 너무 심해서 나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사뭇 궁금했다. 모든 인원들이 두 번씩 사격을 마치고 난 뒤에야 사격 도우미 차례가 되었다.
사격은 100m, 200m, 250m 거리의 표적을을 총 20회 사격하는 기회를 가진다. 가장 멀리 있는 250m의 표적만 가장 적은 횟수로 표적판이 올라온다. 눈이 좋지 않기 때문에 사실 250m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내가 있던 사로가 갈대밭이 우거져 있어서 표적판이 아닌 그냥 까만 점으로만 보였다. 이걸 어떻게 맞추나 싶었다. 20발 중 13발 밖에 못 맞췄다. 실사격이 참 어렵구나 싶었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느껴지는 총의 소리와 몸에 느껴지는 진동은 정말 적응하기 어려웠다.
어제 점호 직전에 싸둔 군장을 메고 화생방 훈련장으로 향했다. 오른쪽 어깨에만 총을 매야 했는데 여기다 군장까지 걸치니 어깨가 쉽게 피로해졌다. 군에 오래 있으면 몸이 상한다는 말이 절로 체감되었다. 화생방 훈련장에서 처음엔 조교의 시범을 보며 8초 이내에 화생방 마스크 착용하는 걸 연습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인원들이 8초 이내에 착용하지 못했다. 아마 진짜 전쟁이 났으면 모두 마스크 못 껴서 생화학 무기에 당했으리라 싶었다. 그놈의 사자머리는 뭐 이리 어려운 건가 싶었다.
눈물과 콧물이 절로 나온다는 화생방실 진입이 시작되었다. 한번에 화생방실에 들어가는 인원들이 많아서 그런지 나는 다른 분대의 인원들과 함께 들어갔다. 분명히 마스크를 꼼꼼히 착용했다고 생각했는데 화생방실에 입장한 순간부터 눈과 목이 따끔거렸다. 호흡할 때마다 느껴지는 따끔함과 가려움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 30초 정도 있고 난 뒤에 마스크를 벗으라고 했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는 몰라도 벗겨지지 않았다. 다른 인원이 대신 마스크를 풀어줬다. 살려달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나비 마냥 몸을 펄럭이며 화생방실에서 뛰어나오고 수통에 있던 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제 2차 체력측정이 있어서 연병장으로 향했다. 윗몸일으키기, 뜀걸음 순으로 측정이 진행됐다. 윗몸은 51회, 뜀걸음은 3.2km를 14분 30초로 통과했다. 두 종목도 미군 훈련소 PT 기준을 넘어서 뿌듯했다. 체력측정이 끝나고 훈련소 중대장이 고생했다며 PX에 다녀올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각 분대에서 일부 인원들만 다녀오게 했는데 내가 과자를 좋아해서 우리 분대에선 나랑 몇몇 동기만 다녀왔다. 사온 과자들로 강당에서 과자파티를 했다. 군것질로 하나가 되고 나름 재밌다.
체력 측정때 너무 열심히 달려서 그런지 허리를 기준으로 하체 근육들이 전부 뭉쳤다. 마치 누군가에게 두드러 맞은 것처럼 말이다. 다들 어제의 체력측정이 힘들었는지 전부 다크서클이 눈가에 길게 내려앉았다. 오전 시간 동안 지혈대와 응급의료 키트로 하는 구급법에 대해 배웠다. 분대원들끼리 하나의 키트를 가지고 서로에게 붕대를 감고 돌려보며 체험을 했다. 아쉬웠던 건 키트가 너무 여러 사람들의 손을 타서 그런지 제 기능을 잘 못했다.
영화나 게임 속에서나 보던 세열 수류탄을 던지는 날이 되었다. 훈련장에 도착하여 조교의 말을 따라 일렬로 길게 줄을 섰다. 앞에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 계속 바뀌는 풍경을 보며 기다렸다. 줄이 줄어들 때마다 산을 울리는 소리와 진동이 더욱 크게 들렸다. 가기 전에 방탄조끼를 착용하고 사로에 들어가기 직전엔 '호 안에 수류탄' 교육을 받았다. 처음엔 연습용 수류탄을 투척했고 이후 세열 수류탄을 연못에 던졌다. 나랑 같이 수류탄을 던져주던 부사관이 내 이름을 불러주며 잘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의 얼굴에서 조차 긴장한 모습이 보였다. 폭탄이 참 무서운 물건이란 걸 다시금 상기하는 경험이었다.
각 종교별로 법명, 세례명 등을 받아두면 좋단 얘기를 듣고 천주교에서 진행하는 영세식에 참여했다. 영세식을 참여하기까지 어려움이 있었는데 근처 연대인 28 연대와 30 연대에 '수두'가 돌아서 모든 종교행사가 취소된다는 썰이 돌았다. 다행히도 우리 연대는 그런 게 없어서 우리 연대 인원들만으로 영세식을 진행했다. 타 종교와 달리 영세식은 굉장히 길었다. 4시간 동안 강당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 세례명은 PPT에 올라온 여러 개 중 본인이 원하는 걸 고르면 된다고 했다. 도미니코를 골랐다. 천주교 영세식은 참여자들에 한하여 햄버거를 주는데 진짜 맛있었다.
지난주 원불교 종교행사 참여 때 입당식 신청서를 작성했다. 원불교를 다시 방문하니 미리 법명과 카드를 만들어주셔서 받아 올 수 있었다. 사실 입대하기 전까지 원불교에 대해 잘 모르고 그냥 이상한 종교인 줄 알고 있었는데 원불교에 다녀올 때마다 이 종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원불교의 법명까지 받으면서 논산 훈련소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종교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원불교가 가장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어서 그런지 매주 주말엔 국가대표선수를 볼 수 있었다. 원불교 건물까지 걸어가는 동안 일부러 선수 옆자리에 서서 얘기를 하며 걸어갔다. 말을 잘 받아주셔서 너무 고마웠다.
'카투사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KTA편] 안정리는 언제나 맑음 뒤 흐림 1부 (0) | 2022.06.27 |
---|---|
[논산편] 안정리는 언제나 맑음 뒤 흐림 4부 (0) | 2022.06.19 |
[논산편] 안정리는 언제나 맑음 뒤 흐림 2부 (0) | 2022.06.05 |
[논산편] 안정리는 언제나 맑음 뒤 흐림 1부 (0) | 2022.05.30 |
[프롤로그] 안정리는 언제나 맑음 뒤 흐림 3부 (0) | 2022.05.22 |